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네치아 공화국 (문단 편집) === 몰락 ===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이스탄불|코스탄티니예]] 무역 경로를 독점하게 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지중해 독점 패권을 잃게 되고, 16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이 [[대서양]]을 이용하는 무역 루트를 개척하면서 전통적인 베네치아 무역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간 베네치아가 독점해오던 향료가 포르투갈에 의해 더 싼 가격으로 유럽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1521년]]에는 포르투갈에게 그 향료 전량을 구매하겠다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향신료가 유럽에서 부와 패권을 좌지우지했던 시대에서 포르투갈이 들여온 [[향신료]]를 싸게 사서 되팔겠다는 것은 '''포르투갈에게 부와 패권을 도로 내놓으라'''는 의미다.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는 미쳤다고 자신들에게 온 부와 패권을 베네치아에게 넘겨줄리가 없고, 자기들이 그냥 팔면 되는 걸 굳이 베네치아를 통해 팔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곧 오스만 제국이 인도양 함대를 창설하여 포르투갈을 견제하기 시작한 데다 [[인도인]]들의 저항도 있어, 알렉산드리아-베네치아를 통한 향신료 교역은 다시 증가했다. 포르투갈 측 첩보 문서에 그냥 인도를 포기하고 베네치아에서 향신료를 사는 게 이익이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리고 범선 시대에 아프리카를 왕복해야 하는 비용은 절대 적지 않았던 만큼, 동지중해 무역은 여전히 수익성이 있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여전히 매우 강했고, 갤리가 사용되던 1600년대 전까지는 유럽 최강의 해군국 중 하나였다. 다만 베네치아가 오스만이랑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중이였고 동지중해 무역도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라는 효율적인 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채산성이 떨어지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1571년 베네치아는 [[스페인 제국|스페인]], [[교황령]]과 함께 신성 동맹 함대를 구성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영토면에서는 오히려 [[키프로스]]를 상실하면서 레판토에서 오스만의 '''수염을 태우는 대신 한쪽 팔을 뽑혔고''' [[전염병]]으로 도시 인구의 30%가 죽어나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전후로 [[나폴리 왕국]]과 관계가 나빠져 곡물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식량 확보 문제가 닥치기 시작한다. 당시 나폴리는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파견한 부왕(副王), 즉 [[총독]]이 다스리고 있어서, 사실상 스페인 영토였다. 그리고 신성동맹을 결성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이해관계가 어긋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리와의 사이도 틀어지는 게 당연지사였지만 막상 당해보니 타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오스만 제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기 된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에게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앞서 말한 수염을 태우는 대신 한쪽 팔을 뽑혔다는 비야냥까지 듣게 된다. 다만 그는 본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데다 레판토에서 패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는 관료들이 있었기에, 본심보다 조금 강경한 발언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상당히 굴욕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당연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 국가들, 특히 스페인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이후로 [[지브롤터 해협]]을 못 건너게 되어 주요 수출 대상이었던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나빠져 조선소에 필요한 나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레판토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더 큰 힘을 실어 주어 진출을 방해하기로 결정해 베네치아의 청년들이 선원이 되는 전통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점점 고립되어가던 베네치아는 교황과의 다툼 끝에 파문까지 당하고 말았다. 이후 베네치아는 예전의 부와 힘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1600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도였던 베네치아의 인구는 14만명에 달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 대국으로 행세했으나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역 거점들을 하나둘씩 빼앗겨나가는 사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17세기에는 베네치아 최후의 무역 거점인 크레타를 두고 [[크레타 공방전|무려 20년 넘게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오스만은 수많은 병사와 무기로 크레타를 맹공격했지만, 베네치아는 당대의 부국답게 엄청난 보급으로 치열하게 항쟁했다. 이때 베네치아측 사상자는 3 ~ 6만, 오스만측 사상자는 무려 12 ~ 24만에 달했다. 하지만 결국 이 전쟁은 양국의 재정을 파탄 상태로 만들었고, 더 이상의 전쟁은 조국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베네치아 수비대 측 사령관 프란치스코 모로시니 ^^(1619년 ~ 1694년)^^가 1669년에 항복함으로써 크레타는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양국은 엄청난 자금을 썼는데, 항복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크레타 1년 방어에 사용한 자금은 이미 베네치아의 1년 세입을 초과했다. 이후 모로시니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이 패배하자 결성된 [[신성 동맹]]에 베네치아가 참가하자 복귀, 베네치아군을 이끌고 그리스에서 오스만군과 싸웠으며 1688년에 도제로 선출되었고 1694년에 사망했다. 1699년에 신성 동맹이 승리하면서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베네치아는 크레타를 수복하지 못했지만 보상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있는 모레아와 일부 영토를 오스만에게 할양받았다. 그 후 베네치아는 모레아를 다시 오스만에게 잃었지만 본토 속령에서의 농업, 무라노 섬의 유리공예와 가공기술, 그리고 [[관광]]업으로 국가를 유지했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아드리아 해에 다른 세력을 들이지 않는 데 주력했고, 1716년 코르푸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결정타는 당시 불었던 태풍으로 오스만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퇴각하게 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3년 후, 극강의 방어력을 보여준 코르푸 섬의 요새는 낙뢰가 화약고 위로 떨어져 대파되었으나 섬 자체는 계속 베네치아가 가질 수 있었다. 18세기 베네치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비발디]]의 전기를 보면 비발디가 활약하던 당시의 베네치아는 쇠퇴 국면에 처해 있었다는 표현이 굉장히 많다. 17세기 이후로 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 고아가 급증했고, 천주교 사제 시절 비발디의 주 업무가 이런 고아들을 돌보면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